2012년 12월
윤원화 (미술문화 연구자, 번역가, 당시 문지문화원 ‘사이’의 다원예술아카이브 리서처)
라삐율 (설치작가, 번역가, 당시 퍼포밍 네트워크 ‘팟저-프로젝트’ 대표)
윤: 팟저 프로젝트 웹사이트(네이버 블로그)의 소개글만 봐서는 현재 팟저 프로젝트가 잠정 중단된 것 같은데, 더 이상 ‘팟저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십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펜테질레아]가 마지막 작업이 된 셈인데 어떤 계기라도 있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팟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든 라삐율이나 혹은 다른 이름으로든 새로 준비 중이신 다른 작업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라: ‘팟저-프로젝트’라는 이름은 이제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시도했던 세 프로젝트들은 니체적 ‘몰락/내려감(Untergang)’과 연관된 것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비극성”에 대한 것이었죠. 참조: http://blog.naver.com/lappiyul/memo/110073461958 그 비극성에 대해서는, 저희 <펜테질레아> 자료집에 좀 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저에겐 이 세 번의 시도가 끝이자 시작을 의미합니다.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듣기 싫다고 하죠. 얼마 전 트위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팟저> 첫연습을 브레히트 서거일에 시작했고, <펜테질레아>는 클라이스트의 서거일을 맞으며 끝냈다. 6년간의 fatzer-project들은 그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내게 주어졌던 그 운명적인 사건들 앞에서 반성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 그리고 세 번의 시도로 저는 내려갈 만큼 내려갔고, 펜테질레아는 그것의 종지부가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다 열거할 수는 없구요, 이젠 다시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이름으로, 독일에서 프로젝트를 계획 중에 있습니다. 그게 어떤 건지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구요, 당분간 한국에선 프로젝트를 추진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윤: 저는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것이 주 업무라서 아무래도 팟저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활동에서 텍스트의 역할에 관심이 갑니다. 어디선가 텍스트를 “누구나 사용 가능한 ‘재료'”라고 표현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문학 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진지하게/과격하게 텍스트의 힘을 믿고 텍스트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모든 연출가들이 희곡을 하나의 재료로서 접근하겠지만 팟저 프로젝트는 텍스트를 “발굴”하는 데서부터 일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작가님이 결국은 희곡을 직접 집필하는 단계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또 절대로 그 위치에는 안 들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본인이 자기 이름을 걸고 직접 텍스트를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 문학 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자신의 텍스트를 과감하게 “재료”로서 던져주지 못하죠. 작가적 권위라는 게 그렇게 버리기 쉽지 않은 것이거든요. 작가는 뭔가 자신의 뜻과 의도를 유지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다르게 쓰이면 작품이 변질, 훼손됐다고 여기기 십상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누구나 사용 가능한 재료”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텍스트에 적용되지 못해요.
제가 발굴한 텍스트들은 작가들에 의해 재료로서 던져지거나, 텍스트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다뤄주기를 원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흥미를 끈 것이었습니다. 브레히트는 ‘팟저’를 채석장처럼 다뤄주길 원했고, 하이너 뮐러의 ‘주운 아이’는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 <주운 아이/Der Findling>를 소재로 동독의 상황을 시사하는 무운시 형태의 희곡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주운 돌처럼 (독일말로 ‘Findling’은 주운 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에 맞게 스스로 다루도록 하였습니다. 클라이스트는 200년 전에, 지금보다 더 급진적인 사고로, 우리가 우리에게 가능한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할 것을 요구했지요. 이들은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습니다. 특히 클라이스트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저의 작업 태도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본인이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총체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 행동이 아니며, 여러 가지의 행동들의 집적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기록이지만 (글쓰기도 결국은 몸을 통한 것입니다.) 그 쓰임새는 자신 몸 밖에서 벌어집니다. 그걸 인정하면 더 많은 자유와 가능성이 보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윤: 팟저 프로젝트에서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폭탄의 역할을 맡습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이 폭탄이 무대화되면서 일파만파 터뜨리고 터지게 될 겁니다. 여기서 책 형태의 희곡집과 워크숍 자료집은 좀 상반되는 역할을 맡는 것 같은데요. 희곡집이 결국 폭파하기/폭파되기의 원심적인 속성을 함축하고 있다면, 워크숍 자료집은 조각조각난 리서치/세미나의 맥락들을 한데 모으려는/응축시키려는 구심적인 속성을 요구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흩어지고/확산되려고 하는 것과 축적되고/모이려고 하는 것은 서로 상반되지만 결국은 책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라: 맞습니다. 그런 이중성이 공존하는 곳이 ‘책’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희곡집과 자료집의 차이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늘 중간단계입니다. 지금 이 메일의 답변도. 그리고 저는 배우들이 그런 텍스트적 성격을 지니길 바랐습니다.
윤: 그러니까 팟저 프로젝트의 전체 작업을 조망할 때, 워크숍과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한 면이라면, 리서치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은 다른 한 면을 이룹니다. 외부자의 관점으로 보기에는 책 쪽이 좀 더 ‘준비과정/이면/무대뒤’에 가깝고 그것을 중심으로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좀 더 본론에 가까운 것 같은데, 작가님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책을 만드시나요? 그것은 어떤 도구입니까?
라: 그렇게 보셔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서로 비슷하게 언급했듯이, 저는 모든 것은 맺고 풀고의 공존(혹은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무대작업과 책작업은 연속선 상에 있거나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도 남는 것은 결국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연은 사라져버리고 경험적 기억으로만 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