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5년 베를린 브레히트 하우스에서 개최된 국제 하이너 뮐러 학회 워크숍 “필록테트/팟저”에서 독일어로, 2006년 주한 독일문화원에서 개최된 퍼포밍 네트워크 ‘팟저-프로젝트’의 7일간의 워크샵 <팟저>에서 한국어로 발표되었다.
한국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인 오늘날 냉전의 잔재를 안고 여전히 남북으로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땅이다. 반 세기를 그래왔기 때문에 이제 이런 상황은 익숙해져 버렸고, 통일문제를 논하는 것도 민족적인 정체성과 역사를 되찾는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어떤 근원적인 인식도 환기시키지 못한 채 – 언제나 그래왔듯이 – 나라간의 국익싸움의 도구가 될 위기에 놓여있다. 신자유주의는 북한을 더더욱 고립되어 보이게 만들고 있으며, 남북의 격차는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져 가고 있고, 남북갈등이라는 실타래는 점점 더 복잡하게 엉킨다. 그리고 왜 통일이 되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앵무새처럼 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6.25가 언제였는지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대답을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끔찍한 얘기였다. 우리의 과거: 이데올로기적 세뇌교육을 받으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같은 표어로 포스터를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전우의 시체를 넘듯이 고무줄을 넘던 경험이 얻그제 같은데, 이제 현시대는 점점 그것을 모르는 세대들에게 물려지고 있고, 그러한 경험이 있던 사람들 마저도 그 시대를 잊어버린 듯 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가 그렇게 묻혀지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우리에게는 어릴 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천사 같은 노래를 부르다가도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라는 잔인한 가사의 ‘6.25’ 노래를 불러야 했던 부조리한 시절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좌우로 갈라져 이데올로기를 운운하는 것이 부적절해 보이는 그런 시대에 살고있다. 그러나 사실 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만큼 이데올로기들이 넘쳐나는 시대는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이제 체제를 옹호하고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언제든지 생산되고 폐기된다. 그것에 따라 ‘적’이라는 대상도 조작되거나 인위적으로 강요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적은 대개 ‘적개념(또는 敵像; Feindbild)’일 뿐이다. ‘적상’은 ‘적’ 보다 더 구체적이다. 왜냐면 ‘적상’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안에서 적대적인 자세를 유발할 수 있도록 동원되는 모든 수단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은 얼굴이 없고 비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이라크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외칠 때, 우리가 접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한 ‘적상’이지 ‘적’이 아니다. 우리는 적의 얼굴을 모르니, 다시 말해 ‘적’은 얼굴이 없다. 저들이 ‘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라크를 말하지 어떤 이라크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비인간적인 것은 그래서이다. 즉, 개인들의 피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팟저>는 이러한 조작된 적상에 교화되어 얼굴 없는 적을 향한 총질을 중단하고 그러한 적상을 만들어내는 체제(System)를 실제의 적으로 규정한다.
이 점이
팟저다
이게 나고 여기에 나의 적들이 있다
무한하게 그어진 선, 이것은
나와 같은 군인들이다, 하지만 내 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갑자기 다른 선
하나를 본다, 그것은 내 뒤에 있고, 그것은
역시 나에게 맞서있다. 그게 뭐지? 그것은
우리를 여기로 보낸 자들, 바로
부르조아들이다.
그렇게 나는
눈 멀게 격노한 전쟁이 3년이 지나고 나서
순간 내 뒤를 돌아보았고
갑자기 모든 것을 보았다. 즉
내 앞에, 내가 대항해 싸웠던 상대는: 내 형제다
하지만 내 뒤에 그리고 내 형제 뒤에는: 우리의 적이 있다.
우리의 지난 얘기를 해보자. 남한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북한 뒤에는 소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한민족은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형제에게 사정없이 총부리를 겨누었다. 적은 잘못 골라졌었다. 진짜 적은 우리 뒤에 있었고,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와 신제국주의적 욕망, 그리고 인간성을 상실한 메커니즘이었다.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으로 갈라져 진행된 냉전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참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한국은 냉전의 가장 중심에서 희생된 어린양이었고, 그러한 운명은 이미 해방과 함께 예고되어 있었다: ‘해방’은 2차대전이 일본의 대 패배로 종식된 덕분에 우리에게 찾아온 선물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결국 새로운 또 다른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당시 소련은 해방된 한반도에서 일본을 몰아내려고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고, 미국은 소련이 그러다 한반도를 전부 장악할 것을 두려워해 38선 획정을 “편의상” 이라는 명목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스탈린 역시 그것을 쉽게 승인했고,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해방 후 앞으로 가야할 길을 생각할 틈도 없이 냉전의 중심으로 치닫고 있었다. 냉전은 한 마디로 이데올로기와 국익을 둘러싼 대결이었다. 하이너 뮐러는 그것을 Krieg ohne Schlacht(전투 없는 전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투는 있었다: 냉전을 주도하던 미국과 소련이 아닌, 작은 힘없는 나라들 안에서! 그 대표적 예가 바로 한국전쟁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과 한국전쟁은 우리 안에서 자연발생한 갈등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이 작은 땅에서 벌어진 비극이 전체 인류의 모순과 야만성을 얼마나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냉전을 낳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인류를 욕망과 야만성으로 가득한 짐승으로 만든 ‘진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제국주의적 욕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원칙’, ‘진보’, ‘자유’, ‘개방’, ‘협력’ 같은 말 뒤에 숨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파괴를 전제로 한다. 그 안에서 환경은 파괴되고, 삶의 기반은 흔들리고, 정체성 역시 파괴되고, 개체는 사라진다. 그 파괴의 극단적인 형태는 전쟁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은 가끔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후 한국재건에 제일 먼저 앞장선 나라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한국은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미국이 한국을 도우려고 했든 딴 뜻이 있었든 결국 그것은 파괴였다. 경제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다른 모든 것들은 파괴되었다. 일제시대에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 역시, 되찾기는 커녕 오히려 더 잃어갔다. 자본주의 안에서 돕는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을 파괴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자본이 망령처럼 떠돌며 투자라는 가면을 쓰고 결국은 자본을 수탈한 뒤 주가가 떨어지면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요즘의 신자유주의 경제원칙은 이러한 것을 더 잘 말하고 있다.
알다시피,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 <화씨 9/11>을 통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 이미 이라크 재건으로 이익을 취하는 사업을 계산해 왔음을 고발했다. 피흘리는 짐승에 몰려든 승냥이들 처럼 세계의 수많은 기업들이 이라크재건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모든 큰 계약들은 부시정권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서 전부 미국 대기업들이 따내었고, 한국은 원하지 않은 남의 전쟁 뒤처리 하느라 자신의 아들들을 이라크로 보내야 했다. 그럼으로써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것은? – 이라크 재건 계약 몇 개 따내기 위해 미국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 그러나 이라크 재건과 민주화는 사실 이라크 민중에 의해 이루어 져야 한다. 한국인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이러한 도덕은 부적절하다. 자본주의의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2001년 뉴욕 무역센터 테러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메타퍼였다면, 미국이 이라크 전쟁 후 비행기로 이라크에 생활용품을 뿌리고 다닌 것은 “자본주의의 영원함”에 대한 메타퍼였다. 이렇게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자본주의다.
팟저가 탱크에서 내려 도시로 가자고 제안한 것은 그래서이다. 그는 이 비인간적이고 무의미한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끊임없이 살상을 계속할 것이고, 개인은 무의미하게 그것의 목적에 도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도시에 들어가 도시를 한 바퀴 돌던 팟저는 도시에서의 투쟁이 전장에서의 전투만큼 치열하며, 전투 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팟저는 말한다: “어쩌면 끊임없이 / 그러니까 나보다 더 오래 걸릴지 모른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렇게 끝이 없는 싸움은 매번 완결되지 못한 채 영원히 단편으로 남아왔다.
팟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누가 이 싸움에서 승리할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부터 전 세월에 걸쳐
너희 세상엔 더 이상 어떤 승리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패배자만이
늘어날 것이다.
늘 이기던 자, 팟저. 모든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동지들을 희망에 부풀게 만들었던 팟저: 그도 패배했다. 그는 동지들이 자신을 죽이게 함으로써 그들 역시 모두 죽게 만든다. 한편, 완전히 혁명가적 자세로 ‘코흐(=코이너)’는 말한다: “두 가지 일을 하지 말고, 한 가지만 해라. / 살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이는 것만 해라.”
언젠가 나는 ‘사람’이 어떤 뜻에서 왔는지 궁금해 사전을 뒤진 적이 있다. 우리말의 ‘사람’은 ‘살다’의 ‘살’과 ‘알’이란 말의 결합이다. 살알. 그것이 변해 사람이 되었다. 살+알: 풀이해 보면, 삶의 중심이란 뜻이다. 즉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 해석은 인간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림은 하나의 유토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안에서, 인간은 삶의 중심에 있지 못하고 물질의 중심에 있다. “삶의 중심에 있다”는 말은 어쩜 더 이상 긍정적으로 해석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 즉, 인간은 삶의 중심에 있고, 따라서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한다는 것이다. 살인이든, 절도든, 사기든, 강간이든, 전쟁이든…
한편, 독일말로 사람은 ‘Mensch‘다. 그림(Grimm)사전에 의하면 “Mensch”라는 단어는 Mann(남자)의 형용사인 “männisch“에서 왔다. 이 단어의 유래는 사람의 정의에 있어서 남성의 우월성과 우선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성경에도 최초의 사람은 남자였다. 그러니까, “Mensch”라는 단어의 역사는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된 세계에서의 남성중심적 역사와, 권력구조, 불평등, 더 나아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적인 역사구조와 갈등, 그리고 폭력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계획들 중
이것만은 남는다: 사는 것.
최고로 위험한 계획이고, 거의 가망은 없다
단지 약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중심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한 가지 유형만을 지니지 못한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너무나 많은 모순적 유형들을 안고 있어야 한다. 단지 살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니까 두 가지 일을 하지 말고, 한 가지만 하라는 코흐의 말, 즉 살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이는 것만 하라는 코흐의 급진적인 가르침 역시 세상을 구할 순 없다. 왜? – 우리는 그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
그러나 영원히 패배자만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고는 암담하고 절망적이다. <팟저>의 몰락, 그것은 현실과 미래의 어두움에 대해 진정한 해결점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집단 몰락: 그것은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말이다. 이는 어떠한 갈등구조가 해소되어 관객에게 안도감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답답함, 혹은 착잡함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 브레히트가 어떤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 선택한 결말도 의도도 아니었다.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수불가결한 결말이었다. 풀리지 않는 계산을 시도했으니 몰락은 처음부터 눈에 보듯 훤했던 것이다. 그것이 풀리지 않는 계산의 ‘정답‘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이러한 암울함과 동시에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 희망의 첫 형태는 두려움이다. 하이너 뮐러는 “불안은 교육적인 것이며, 불안이 없으면 진보도 없고 문화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이 두려우면, 그것으로 부터 벗어날 해결책들을 요구함으로써 사회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두려움을 통해 그 시작을 알린다. 혁명을 꿈꾸던 네 명의 탈영병의 몰락은 이렇게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 곳에서 거행된다. 그 곳은 일종의 ‘빈틈’이다. ‘팟저’는 이러한 빈틈에 관한 텍스트이다. 옛시대와 새시대의 사이, 아직 아니다와 이미 더 이상 아니다의 사이, 전쟁과 혁명의 사이.
한국의 역사는 늘 수난과 극복의 과제를 반복한, 한 마디로 과도기가 아닌 적이 없는 역사다. 한국인들은 그 어느 민족 보다도 혼란스러운 갈등과 모순을 안고 살아와야 했다. 하이너 뮐러와 하우프트만이 독일의 역사가 어느 혁명도 이루어지지 못해 어느 시대도 끝까지 살아지지 못한 역사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단편성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여전히 분단을 안고 있는 한국인에겐 더 극대화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 역시 “과도기”라는 명분 하에, 자본주의와 메커니즘으로 인해 단편적으로 머물게 되었다. <팟저-단편>은 그런 점에서 한국의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거대한 구멍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구멍 안에서 3분 간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 안에는 불안함이 희망과 뒤엉켜 있다. 그 안에서 많은 것이 제안된다. 그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기다려진다. 구멍! 팟저의 몰락은 그 거대한 대기소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