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운 아이”에 관한 Interview

다원예술매개공간(이하 ‘다매공’) 비평풀 ‘오주연’씨의 질문에 대한 대답

 

 


<주운아이>는 “국제적 규모의 다원적 워크숍”으로 제시되어습니다. 리서치와 발제 프로그램 등 워크숍의 과정이 1차 쇼케이스에 충분히 반영되었다 생각하십니까?

워크샵 쇼케이스는 우리가 무엇을 “만들었다”는 것 보다는 어떠한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고, 우리가 리서치한 수수께끼들에서 어떠한 맥락을 찾아 그냥 나열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녁마다 열린 세미나는 작품의 아이디어에 도움을 주었다기 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팀과 달리 한국팀은 두 작가의 텍스트를 계속 놓치지 않으면서, 발제내용을 이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연극이라는 작업을 위한 중요한 경험으로 삼았습니다. 만일 그 프로그램을 통해 오고간 말들이 지금은 어떤 창작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멀리 보았을 때, 분명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느낀 것은 아무 문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찾으라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극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도 필요성도 생기지 않지요.


독일팀과 워크숍(작품창작 관련)을 따로 진행하고 결과를 공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일팀의 작업이 라삐율씨를 비롯한 한국팀의 ‘한국적 해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사실 그들의 작업이 ‘한국적 해석’에 영향을 주진 않았습니다. 말했듯이 그들은 하이너 뮐러를 버리고 클라이스트의 “주운 아이”만 택했어요. 그들은 골치 아픈 것과 싸울 의지가 없었지요. 즐기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이었어요. 어떤 그림을 보여주려 하였고, 그건 아주 정돈되고 세련된 그림이었지요. 하지만 아주 간편해 보였어요. 그런데 저희 그림은 마치 목에 가시가 낀 것 같은 상태였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했죠. 참가자들의 이질적 경험이 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존하고 있었고, 여전히 충돌 속에서 길을 찾고 있었어요. 저에게 이 두 과정과 결과물의 대비는 매우 흥미로웠고, 그것을 통해 저는 저 스스로를 재점검할 수 있었죠. 생각해 보면, 연극은 이렇게 끝없는 대치상황들 속에서 굴러가는 것 같아요.


10월 첫번째 쇼케이스 이후 12월 무대공연을 올리기까지 어떤 점이 가장 난관이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전에 다매공에서 했던 말이겠죠: “연극은 참가하는 개개인의 관심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하지요.” – 그것 없이 연극은 발생하지 않아요. 아무 충돌도 도약도 발생하지 않고, 마치 고집 센 당나귀처럼 꼼짝도 하지 않죠. 연극은 자발적인 움직임이거든요.

이번 기회로 전 수동적이고 수직적인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연극교육에도 신물이 났어요. 대부분의 배우들은 누군가가(예를 들어 연출가가) 원하는 존재를 무대에 재현하려고 할 뿐, 자기의 경험을 스스로 끌어내질 않아요. 그러니 무대는 실재 없는 상징으로 가득해져 버리죠. 가짜란 말입니다. 하지만 무대는 허구를 얘기해도 실재의 세계라고 전 생각해요. 사실 이번에 저는 그러한 실재를 끌어내는 데 있어서 실패한 것 같아요.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저 스스로가 이미 burn out 상태였는데, 그러한 저를 뛰어넘지 못했던 거지요. 많이 흔들렸어요. 게다가 중간에 배우를 교체하면서 실재를 구축할 시간도 많이 부족했지요.

사실 몽타쥬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그건 공연의 형식이기도 했지만, 내용과 과정의 형식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렇다 할 그림을 먼저 설정하지 않고 모든 참가자들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그것들을 만들어 가려 했죠. 나도 알 수 없는 끝. 오딧세이. 그러나 사실 현실은 그것을 그다지 허락하지 않는 듯 했어요. 밥 먹여주지 않는 창작의 비극이죠. 마인드 문제이기도 하구요. 이런 방식은 어쩌면 독일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어찌됐건 제가 그렸던 그림과 비슷하게 공연이 올라가긴 했지만, 이러한 과정의 숙제는 풀리지 않고 공연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 한계가 무대에서도 드러났다고 생각하구요.

또 하나 어려웠던 것은, 연출적 기술이었습니다. 저는 배우들에게 흔히 “감정선”이라고 하는 것을 매번 버리고 다른 스위치를 작동시키라고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기술이었어요. 감정이 풍부한 배우에겐 더더욱 어려운 방법이었죠. 그런데 그게 저에겐 매우 중요한 형식적 요구였어요. 이리저리 튀는 구슬 같은 클라이스트의 문체와 하이너 뮐러의 리좀적 사고, 단편(斷片)적이고 동시적인 시간성을 따라잡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제가 <팟저> 작업 때, 한 문장에서도 각 단어 마다, 다른 감정과 다이나믹으로, 서로를 들으면서,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고 그 순간이 되어 대사를 치라고 요구했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건 매순간 자신을 다른 상황에 놓고 변화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것이 저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의 실재라고 생각했고, 이번에 몽타쥬 어쩌구 하면서 그러한 기술을 더 극대화시켜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배우들을 제대로 도와줄 수 없었지요. 해결의 열쇄는 물론 배우들이 쥐고 있었지만, 전 그들의 리듬을 찾아주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직은 배울 것이 많은 연출자죠.


비평이 현장을 말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본인의 작업을 예로 들어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비평은 대부분 결과물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요. 그런데 “현장”이라고 하셨는데, 현장을 말하려면 결과물만 봐서는 안 되지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한국엔 진정한 비평가가 없어요. 다들 바쁘거든요. 시간이 없으니까 뛰어들지 않고 밖에서 대충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밖에서 뭐라고 하는 것은 관객리뷰나 감상문에서도 얻을 수 있쟎아요. 게다가 단순한 작품비평이 아니라 현장을 비평하려 하신다면, 창작자의 근본적이 고민을 알려고 하고, 그것이 실현된 과정과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창작자를 이해하려는 자세 뿐 아니라 그에게 자극이 될 수 있는 충격장치도 제시해 주시면 좋겠지요.